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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共感)W]플라이볼 레볼루션, 어벤져스보다 재미있는 인천야구

SSG 랜더스 2018. 6. 11. 16:50

 

 

시계를 잠시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흐르기 전, SK 왕조의 불길이 거세게 리그에 휘몰아치던 시절. 와이번스의 10년 에이스, 김광현이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던 그때. 많은 것이 바뀌기 전이었고, 많은 것이 지금과는 달랐다.
많은 추억이 떠오르겠지만, 초점을 작고 사소한 것 하나에 맞춰보자. 당신은 그때 전광판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 시절만 해도 전광판의 볼카운트는 지금과 다른 모양새로 표시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볼-아웃 순서. S-B-O 순서는 오늘날 B-S-O로 표시되는 순서와는 달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풀카운트’라고 하면 ‘2스트라이크 3볼’이라고 풀어내지, ‘3볼 2스트라이크’라고 하지 않는다. 작지만 다소 거슬릴 수도 있는 이 변화는 몇 년 전 미국의 볼카운트 표기 체계를 따라가게 된 것이다.


볼카운트 표시 뿐이랴, 우리가 즐겨보는 야구의 많은 것이 미국에서 비롯됐다. 본디 야구라는 스포츠부터가 미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게임을 20세기 초에 들여온 것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의 야구는 게임의 전략조차도 미국의 그것을 들여올 때가 많았다. 먼 옛날의 일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SK의 야구에도 미국 메이저리그의 ‘선진 문물’이 수입되었음을, 와이번스의 매니아를 자처하는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트레이 힐만 감독의 부임과 함께 주목받은 SK의 내야 수비 시프트 전략은 이제는 KBO리그 전반에 걸쳐서 거스를 수 없는 필수적인 전략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트렌드 세터’와 ‘패스트 팔로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2000년 후발주자로 리그에 합류했지만, SK는 KBO리그의 전략적 트렌드를 이끄는 선두주자 역할을 맡은 역사가 있다. 과거 왕조 시절에는 도루와 불펜의 파상공세로 리그의 흐름을 뒤바꿨고, 최근에는 수비 시프트 전략을 통해 선진문물 도입에 머뭇거리든 다른 팀들의 경종을 울린 바 있다.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 한가지 더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플라이볼 레볼루션’으로 불리는, 장타와 홈런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공격적인 타격 전략이 그것이다.


언제부터 SK가 도루와 불펜으로 대표되는 ‘토탈 야구’에서 ‘홈런 공장’으로 탈바꿈했을까. 전략기조 수립과 실천은 한참 전부터 시작됐을지 몰라도, 눈에 띄는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16년즈음이었다. 2009년 이후 경기당 1개를 넘어선 적이 없었던 SK의 홈런 페이스는 이해 창단 처음으로 경기당 1.26개를 넘어서며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조용히 ‘플라이볼 레볼루션’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땅볼 안타 대신 한방을 추구하는 야구가 다시 대세로 떠오른 것이다.

 

미국에서 ‘장타 유행’이 일어난 배경


‘플라이볼 레볼루션’, 우리말로 하면 ‘뜬공 혁명’이 된다. 하지만 우리말의 뜬공과 여기서 이야기하는 ‘플라이볼’의 의미는 다르다. 흔히 말하는 뜬공은 내야수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내야 뜬공, 혹은 외야수가 여유롭게 잡을 수 있는 공을 말한다. 그런 하찮은 공을 갖고 ‘혁명’ 운운하긴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플라이볼’은 쭉쭉 뻗어 외야를 가로지르는, 담장 너머로 강력하게 날아가는 뜬공이다. 그러니까, 잘 맞힌 뜬공의 가치를 재조명하자는 전략적 트렌드가 ‘플라이볼 레볼루션’이다.
그런데 왜 하필 뜬공이었을까? 점수를 내는 방법은 홈런 밖에도 많다. 땅볼이든 뜬공이든 안타는 모두 같은 안타고, 안타 외에 도루나 스퀴즈 등 다른 전략도 있다. 비밀은 메이저리그의 득점 환경에 있었다.
메이저리그는 2008년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트레이닝 기법 연구가 이뤄지며 빠른 공의 평균 구속이 시속 145km에서 149km까지 늘어났다. 그러자 삼진은 늘어나고 볼넷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2014년 즈음부터 내야 수비 시프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약팀이 살아남기 위해 실험적으로 도입했던 이 전략은 점점 리그 전체의 유행이 됐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늘어난 존의 넓이와 구속 때문에 타자는 공을 맞히기조차 어려워했다. 어떻게든 공을 방망이에 맞혀도, 땅볼이 나오면 시프트 때문에 글러브에 공이 잡히기 일쑤였다.

 


지난 10년간 메이저리그에서는 삼진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삼진을 당할 확률은 늘어나고 공을 맞혀도 안타로 만들기 점점 어려워졌다. 득점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2006년 4.86점에 달했던 경기당 득점은 2014년 4.07점까지 감소했다(2017년 KBO리그 경기당 득점은 5.33점). 강타자의 상징과 같은 ‘30홈런-100타점' 기록도 희귀해졌다. 타자들은 절벽 위로 내몰렸다.

궁지에 몰린 타자들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어차피 안타 하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면, 차라리 그 안타 하나의 가치를 높이기로. 단타보다는 장타를, 땅볼보다는 라인드라이브와 뜬공을 노리는 스윙을 찾기로. 사실은 수십년 전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강조했던 스윙이지만, 여태까지 잊혀져 있었던 타격 철학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무수히 많은 지도자들이 주입식교육처럼 강조했던 ‘다운 스윙’에 반하는 발상이었다.


그렇게 혁명이 시작됐다. 메이저리그의 홈런은 2015시즌 후반기부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한 시즌 최다 홈런이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플라이볼 레볼루션’은 이렇게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하지만 조금 늦은 시기, 지구 반대편 KBO리그에서도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 2017년, KBO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은 타고투저 현상 완화를 명분삼아 좌우로 넓어졌다. 경기당 득점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표면 아래로는 조용히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투수들의 탈삼진이 늘어나고 볼넷이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2016년부터 시작된 SK 타선의 변화는, 본격적으로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