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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共感) W] 저니맨에서 SK루키팀 코치로, 손지환 코치의 끝없는 도전

SSG 랜더스 2013. 2. 21. 11:53

공감(共感) W는 SK와이번스의 선수, 팀, 경기, 마케팅, 사회공헌활동 등 구단의 다양하고 소소한 스토리를 팬들과 함께 나누고자 마련된 소통 채널입니다. 


유격수, 2루수, 3루수 게다가 외야수까지…. 그라운드 안에서 돌고 또 돌았다. 촉망받는 신인으로 LG에 입단해서 KIA, 삼성, SK, 한화까지, 총 5개 팀을 유랑했다. 말 그대로 ‘저니맨’이었다. 심지어 독립리그에 도전해 현해탄을 건너기까지 했다. 분명 순탄한 야구인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더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은퇴 이후 SK의 부름을 받은 그는 지난 2년 간 SK의 사회공헌활동을 전담하는 코치직을 맡았다. 그리고 성실성을 인정받으며, 1월 현장에 발을 내딛었다. SK 루키팀의 손지환(35) 수비코치 얘기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는 육성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신생구단 창단, FA(프리에이전트)선수 몸값 폭등, 외국인 선수 영입 비용의 증가 속에 각 구단은 자구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SK 역시 선수 키우기의 큰 그림을 그렸다. SK는 이미 2012년부터 선수 육성시스템 정립을 준비했고, 2월 중순부터는 민경삼 단장이 육성팀장을 겸임하며 유망주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SK의 육성팀은 퓨처스팀(2군)과 루키팀(3군)으로 나뉜다. 루키군에서는 주로 프로 초년생들의 기본기 습득을 담당한다. 육성시스템의 기층단위로서 그 책임은 막중하다. 손지환 코치 역시 누구보다 루키군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 보다 더 큰 열정으로 구슬땀을 흘린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는 한달 남짓. 하지만 이미 SK구단 내부에서는 “선수들이 친형처럼 믿고 따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의 야구인생을 정리하고, 지도자로서의 포부를 들어봤다.


● 비운의 저니맨? 끊임없이 도전한 프로 14시즌

-휘문고 시절 촉망 받는 선수였는데 프로에 와서는 기회가 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사실 좀 프로에 시끄럽게 들어갔잖아요.(연세대와 LG 사이에서의 스카우트 파동) 제가 원래 유격수를 주로 봤는데, 그 포지션에서는 유지현 선배님이 계셨어요. 2루수는 박종호 선배도 계셨고…. 신인으로서 1군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출전 기회는 좀 적었어요. 제 실력이 분명 선배님들에 비해서 부족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계속 덕아웃을 지키는 것 보다는 차라리 2~3년 2군에서 뛰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때는 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코치가 되고 보니까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든 2루수든, 유격수든, 3루수든 자리를 잡아서 살아남았어야 하는데….”


-2003년 말, 진필중의 보상선수로 KIA에 가게 됐는데, 그 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당시 KIA는 워낙 군기가 세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사실 걱정을 했죠.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어요. 심재학, 이종범 선배 등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잘 적응해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고, 제 프로생활에서 가장 많은 경기도 출전하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던 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맺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잘 적응을 하다가 2008년 삼성 유용목 선수와 트레이드 됩니다.

“이제는 지난 얘기지만, 그 때는 정말 충격이 컸어요. 솔직히 서운하기도 했고요. KIA에 있을 때 FA가 1년 남았었거든요. 삼성도 당시 내야가 상당히 강했어요. 스프링캠프에서 열심히 했지만, 제 실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 때 많이 좌절을 했지요.”





-2008시즌 종료 후 삼성에서 결국 방출되고, SK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저 자신도 야구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정말 의욕이 넘쳤어요. 마무리캠프 때부터 훈련량이 엄청 많았어요. 아, 그런데…. 1월에 스프링캠프 가자마자 둘째 날에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어요. SK구단에 너무 죄송했죠. 겨울에 세 달 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국 재활군에만 주로 머물렀죠. 선수생활 돌이켜보면, 부상을 많이 당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큰 부상을 당해서 아쉬워요.”


-SK에서도 2009시즌 후 방출당하고, 독립리그에 도전하셨죠?

“야구를 포기하기가 너무 억울하고 아까운 거예요. 나이도 서른 갓 넘은 정도였고…. 그러던 중 독립리그를 알게 됐어요.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의 한국인 구단 코리아해치팀에) 또 한번 마지막도전이라고 생각하고 가게 됐어요. 많이 고생했죠. 일단은 프로랑은 많이 달라요. 숙소, 식사, 구단버스 이런 것들이 다 열악했어요. 그래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당시 일본 팀들은 한국프로야구 2군 정도 수준이었다고 보거든요. 그 선수들 상대로 타율도 4할 가까이 치고…. 좋은 성적을 거뒀어요. 석 달 정도 독립리그를 뛰고 있었는데, 한화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송광민이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되면서 내야수가 필요한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한화 유니폼을 입은 뒤 상당히 의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야가 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팀이었어요. 몸 날리고 허슬플레이들도 종종 했죠. 그런데 돌아온 지 2달 만에 번트를 대려다 두산 임태훈 선수 공에 오른손 엄지를 맞았어요. 결국 골절로 시즌을 마치게 됐죠. 아…. 이제는 선수생활이 쉽지 않겠구나 싶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한화에서도 나오게 됐죠. 나이가 젊은 선수도 아니었고…. 프로는 냉정한 거잖아요. 제가 확실히 보여준 것도 없었으니까.”


-우여곡절이 많은 선수생활이었는데, 끈끈하게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했는데,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야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지금도 그라운드에 있는 것이 좋아요. 불러주는 데만 있다면, 몸만 허락이 된다면 연봉 상관없이 계속 하고 싶더라고요. 마흔 넘어서까지 하시는 선배들보면 지금도 부러워요. 은퇴하고 사회인야구를 뛰면, 그 때도 너무 재밌어요. 그런데 프로야구면 어련하겠어요? 야구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은퇴 결심했을 때는 잠이 안 왔어요. 3개월 정도 불면증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프로선수시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요?

“제가 7타점을 한 적이 있어요.(KIA소속이던 2005년 5월15일 잠실 LG전) 그 때 당시 LG 선발투수가 진필중 선배였어요. 제가 진필중 선배 보상선수로 LG에서 KIA로 간 것이었잖아요. 사실 제가 당시에 LG랑 할 때 더 잘했던 것 같아요.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더 이를 악물고 했거든요. 그 경기에서도 3점 홈런 2개 포함해서 5타수3안타7타점을 기록했어요. 제 야구인생에서 한 경기에 가장 많은 타점을 올린 경기라, 기억에 남네요.” 


-KIA소속이던 2007년 6월 13일 대구 삼성전에서 2루수로 출전해 프로야구 최초의 ‘무보살 삼중살(Unassisted tripleplay)’도 기록했는데요, 당시 상황도 설명을 좀 해주세요.

“빠른 주자들이 아니었어요. 2루주자가 양준혁 선배였고, 1루주자는 심정수 선배, 타자는 박진만 선배였어요. 어우…. 연봉만 해도 엄청난 선수들이었어요. 주변에서 우스갯소리로 ”그 대단한 연봉을 받는 세 선수를 네가 잡은 거라고“라고 그랬어요. 노아웃에 볼카운트가 3-2였을 거예요. 삼성은 자연스럽게 런앤히트가 걸린 상황이었고…. 박진만 선배 타구가 2루 쪽으로 가는데 제가 희한하게 그쪽으로 두 발 정도 옮기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쪽으로 빠른 타구가 오는 거예요. 잡고(1아웃), 2루 밟고(2아웃), 이미 스타트를 끊은 1루주자 태그하고(3아웃). 그렇게 3아웃이 된 거죠.”


-내야 전 포지션과 외야수로도 뛰는 멀티 플레이어였는데, 본인에게 가장 맞는 포지션은 어디였나요? 

“원래 유격수였는데, 프로에 와서는 2루수를 했던 기억이 많아요. 운 좋게도 2007년에는 올스타전 서군 2루수 부문 올스타도 돼 보고요. 심지어 외야수까지, 여러 포지션을 해 본 것이 지도자생활을 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현재 루키군은 내•외야 수비코치가 나눠져 있지 않거든요.”


-선수 생활의 가장 큰 아쉬움은 어떤 것이 있나요? 

“제가 그 때는 욕심이 조금 덜 했던 것 같아요.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는 열심히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어요. 프로야구 선수라면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한데 더 열심히 했었어야 하는데…. 지금도 선수들한테도 ‘너희 때가 제일 행복한 것이다. 난 지금도 선수하고 싶어.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10년씩은 더 해야 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라는 말을 종종 해요.” 






● 다문화가정 학생들부터 사회인야구팀까지, SK의 사회공헌활동 전담코치로

-은퇴 직후, 2011~2012년에는 SK의 사회공헌활동 관련 전담코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한 것인가요?

“SQ(Sports Quotient•스포츠지수)전담 코치로서, 일반 학생선수들에게 야구를 가르쳤어요.(홈경기SQ프로그램, 찾아가는 SQ교실, 출장 SQ교실 등) 야구를 통해서 신체활동을 하고, 사회성과 협동심도 기르고…. 전문 학생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야구강좌. 사회인 야구교실 등도 했습니다. 인천 지역의 다문화 가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천SK어울림야구단 코치’도 기억에 남네요.”


-야구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학교의 요청에 따라 전교생 500명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쳐 본적도 있어요.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티볼을 많이 활용했어요. 정지해 있는 공이라고 치기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조금씩 맞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더라고요. 미니게임도 많이들 좋아하고요. 또 하고 싶다고 7~10번까지 다시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그럴 때 보람을 느꼈죠. 종종 야구에 재능이 있는 초등학생들도 보여요. 그럴 때면 야구부 있는 학교로 가보라고 말하기도 해요. 야구 잘해서 탐나는 여학생들도 있어요.”


-사회인야구팀들은 프로선수 출신 코치에게 배우는 기회가 흔치는 않은데요,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무엇보다 구단에서 잘 지원을 해줘서 구장 섭외나 야구용품 지원 등이 잘 되니까, 그 점을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제가 직접 던져줘서 받아칠 때 보니까 잘 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렇게 야구 인기가 좋아졌구나’ 하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죠. 사회인야구팀들은 정말 열정이 대단하세요. 하루는 비가 엄청 쏟아졌는데도, ‘그냥 비 맞으면서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사회인야구 동호인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요?

“스트레칭이나 워밍업을 좀 등한시 하는 것 같아요. 야구장 나오시면 바로 공 던지시는 장면을 많이 봤거든요. 그러다 저한테 물어보세요. ‘어깨 뒤쪽이 갑자기 아픈데 왜 그런 거죠?’ 아무래도 이렇게 추운 날 캐치볼을 바로 하면 부상 위험이 있어요. 아침 일찍 경기하시는 경우도 있으니, 최소한 5~10분이라도 스트레칭을 하셔야 합니다.”


-2012년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처음에는 좌충우돌이었어요. 야구를 처음해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물론 다문화가정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내성적이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야구를 통해서 협동심도 키우고, 친구들도 사귀게 되니 그런 점들이 좋더라고요. 운동을 하면서 예의범절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어요. 나중에는 친구들이 인사도 잘하고, 한층 밝아져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중 제일 잘 했던 친구는 리틀야구팀에 소개를 시켜줘서 선수반에서 잘 하고 있습니다.”





● 수비코치로 프로 무대로 귀환, “친형 같은 코치가 되고 싶다.”

-루키군 코치로 프로야구에 복귀한 소감은요? 

“선수로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꼼꼼하고 세심하게 어린 선수들을 잘 가르쳐보고 싶어요. 항상 소통하고 연구하겠습니다. 이만수 감독님이나, 김용희 2군 감독님, 이광근 수석코치님께서 항상 선수와 대화를 많이 하라고 조언해주세요. 심지어 가정사가 어떤 지, 선수들의 세세한 고민까지 잘 알아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말씀이요. 한 달 넘은 기간 동안 선수 파악을 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 것 같습니다.”


-선수들에게 어떤 점을 강조하나요?

“컨디션이 안 좋은데, 무작정 훈련량을 늘린다고 실력이 느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너희들이 필요할 때마다 날 찾으라’고 얘기해요. 수비가 좀 부족하다 싶으면 자발적으로 ‘펑고 좀 쳐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억지로 끌려가는 선수는 성적도 안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을 비춰 봐도 자기가 하고 싶을 때 더 훈련의 능률이 높죠. 요즘 펑고를 쳐달라는 선수들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습니다. 현재 루키군에는 20대 초반의 신고 선수들이 많아요. 신고 선수 중에서도 스타선수가 된 케이스가 있잖아요.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선수보다 조금이라도 더 (훈련을) 하려고 해야지요.”


-이만수 감독이 베너블 코치를 선발할 때 아이들을 가르친 경력을 높게 샀다고 하는데 아이들과 선수들을 가르칠 때 무엇이 다른가요?

“사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훨씬 어려워요. 세세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다 봐줘야 하고, 훨씬 자세히 설명을 해줘야 하잖아요. 기본기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니까요. 2년 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기본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깨달았어요. 어떤 분들은 ‘리틀야구에서 가르치던 사람이 어떻게 프로야구선수를 가르치나?’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사실 야구의 기본기는 다 똑같거든요. 지금 루키군에도 프로에는 왔지만 기본기가 다소 부족한 친구들이 있어요. 루키군 코치는 기본기를 다듬는데 집중해야 하니까, 지난 2년간의 경험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선수들에게 ‘천천히’를 중요하게 이야기 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요?

“너무 잘하려다보면, 실수가 많아지거든요. 제가 20세 때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해요. 2군 감독님이 보고 계시면 더 급해지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되는 거죠. 하지만 내야수는 안정적인 것이 중요하거든요. 빠른 것보다도 안정감있게 하라고 많이 주문합니다.”


-코치로서 첫해의 목표나 각오는 무엇인가요?

“SK구단에 감사해요. 선수로서 여기 와서 부상도 당하고, 좋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기회를 주셨으니 까요. 일단 프로 코치로 들어 온 첫 해니까, 많이 배우겠습니다. 루키군에서 2군으로 올라가는 선수들이 많아지도록 해야죠. 그렇게 단계적으로 밟아 나아가서 결국 1군에도 보탬이 되도록 이요. 선수들한테는 친형처럼 다가서고 싶어요. 고민이 있으면 편하게 와서 상담을 할 수 있는…. 윽박지르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코치가 되고 싶습니다.”



전영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