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느낄 수도 있는 시간이다. SK에 있어서 이번 36일간의 마무리훈련은 김용희 신임 감독의 새 철학이 팀에 녹아들고, 선수들이 그에 맞춰 생각을 바꾸고, 훈련 방식에 영향을 주는 과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며 후자에 가까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유익했던’ 마무리훈련을 마치고 내년을 기약하게 된 SK의 '가고시마 마무리훈련 36일'을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1. ‘鄭에 대한 기대감’ 가고시마 뒤덮었다
타석에서 직접 상대 투수의 공을 확인한 임훈은 “공이 살벌하다. 역시 진짜다”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그런 타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마운드의 한 투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타석에서는 한 타자가 연습 배팅에서 연신 장타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김용희 감독, 그리고 김무관 신임 타격코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각각 마운드와 타석에서 코칭스태프의 이목을 사로잡은 주인공은 이번 마무리훈련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인 정우람, 그리고 정상호였다.
정우람이 돌아왔다. 약 2년 동안 상근예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정우람은 이번 마무리훈련의 최대 수확 중 하나다. 2년간의 공백 때문에 마운드, 그리고 단체 훈련이 낯설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역시 정우람은 정우람이었다. 마치 어제도 마운드에 올랐던 선수처럼 이질감 없이 팀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주위의 기대, 그 이상의 구위를 보여주었다. “당장 마무리 후보”라는 말처럼 내년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우람이라면, 리그 최고의 왼손 불펜 요원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번 캠프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은 조나단 허스트는 한 눈에 정우람의 ‘위력’을 알아챘다. 이번 캠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투수로 그를 뽑았다. 마운드에서의 공격성, 타자를 압도하는 위압감에서 모두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2년의 공백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정우람은 이런 평가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현재는 몸 상태를 순조롭게 끌어올리는 과정에 있다. 실전감각을 보완해야 한다”라며 의지를 다졌다. 그 의지와 함께 SK의 불펜 전망도 덩달아 밝아지고 있다.
타석에서는 정상호가 가장 주목할 만한 선수로 손꼽혔다. 정상호는 국내프로야구 현역 포수 중 가장 좋은 체격조건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안정적인 수비 능력, 그리고 투수들을 독려하고 이끄는 리더십까지, 이제 어엿한 베테랑의 냄새가 풍긴다. 반면 타격 쪽에서는 여전히 잠재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제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라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힘들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코칭스태프의 생각은 달랐다.
김용희 감독과 김무관 코치 모두 정상호의 장타력 발전 가능성에 대해 입을 모았다. 김용희 감독은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선수다. 장타력 부분에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타격도 향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무관 코치는 “중장거리, 큰 것을 칠 수 있는 선수다. 내년에 기대가 많이 되는 선수”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내년 시즌 후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동기부여도 상당하다. 맹활약을 기대해 봐도 좋을 이유다.
2. ‘재활과의 싸움’ 중간 성적표는 이상無
아직은 아프다. 하지만 내년에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재활군에 포함된 선수들도 이번 가고시마 마무리훈련에 참가해 몸과 마음을 정비했다. 저마다 아직 몸 상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번 훈련을 통해 김용희 감독의 새로운 철학을 공유하고 한국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곳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소화했다. 선수들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밝아졌다. 내년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 요소였다.
핵심 선발 투수인 윤희상은 올해의 불운을 넘어 내년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윤희상은 “의학적인 재활은 모두 끝난 상황”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는 근력을 강화하는 운동에 이어 실전 감각 정비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번 마무리훈련에서는 간단히 공을 던졌고 수비 훈련은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했다. 불펜 투수 윤길현도 휴식을 취하며 조금씩 제 컨디션을 찾아가고 있다. 올해는 어깨가 아파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내년 스프링캠프까지 반드시 몸 상태를 끌어올리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장기간 부상에 시달리고 있는 엄정욱은 이번 마무리훈련에서 다른 투수들과 같은 프로그램을 소화하며 조용히 복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현재 재활은 막바지 단계로, 앞으로 심리적인 부분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컨디셔닝파트의 의견이다. 박희수는 아직 어깨 상태가 완벽하게 회복된 단계는 아니지만 꾸준히 검진을 하며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현재, 수술까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고 있어, 상황이 아주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3. ‘신예들의 성장’ 가고시마의 활력소
베테랑 선수들이 앞에서 끌고, 신예 선수들이 잘 따라온 마무리훈련이었다. ‘고참’들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김용희 감독의 지론에 베테랑 선수들이 완벽하게 부합했고, 여기에 신예들의 성장이 캠프의 활력소가 됐다. 2군 감독, 육성총괄 시절부터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봐 온 김용희 감독의 눈빛도 번뜩였다. 그리고 SK에 대해 “앞으로 지켜봐 달라”라고 자신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서진용은 당장 내년 1군 불펜에서 활약할 수 있는 구위를 갖췄다는 평가다. 150㎞에 이르는 빠른 공으로 상무의 에이스급 역할을 했던 서진용은 스스로도 내년 불펜 합류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보통 선발보직을 선호하는 다른 선수과는 달리, 자신의 목표를 ‘마무리’로 점찍는 모습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른 체형이었던 서진용은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라 입대 전 몸무게가 75㎏ 정도였는데 지금은 90㎏ 가까이 불린 상황”이라며 캠프 내내 웨이트 기구와 씨름했다.
이진석은 엄청난 주력(走力)으로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고교 시절부터 빠른 발로 정평이 나 있었던 이진석은 이번 가고시마 마무리훈련 프로그램 일환으로 이뤄진 단거리 측정에서 30m(3초79), 70m(8초24), 100m(11초55)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그간 팀의 최고 준족으로 알려져 있던 박계현과 김재현을 앞서는 기록이다. 박계현은 “(이)진석이가 워낙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날 허벅지가 좋지 않았다고 들었는데도 좋은 기록을 냈다”며 놀란 표정이었다. 김용희 감독도 “자질이 있는 선수”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투수 쪽에서는 김정빈이 화제를 불러 모았다. 특히, 마운드 위에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허스트 인스트럭터는 이번 훈련을 통틀어 신진급 투수 중 김정빈의 구위가 가장 좋았다고 평가했다. 타자들도 “특히 체인지업이 좋다. 정우람의 신인 시절을 보는 것 같다”라며 놀랐다. 김정빈은 “직구, 커브,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이번 캠프에서는 슬라이더를 연마하고 있다”며 내년 1군 진입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쉬는 시간에는 팀 선배인 김광현과 고효준의 폼을 똑같이 따라하며 코치 및 선배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 김원형 코치는 마지막 키킹까지 김광현의 폼을 따라하는 김정빈을 보고 “정말 그렇게 한 번 던져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4. ‘힐링의 시간’ 선수들은 무료해?
이번 마무리훈련의 또다른 화두는 ‘잘 쉬는 것’이었다. 김용희 감독은 “물론 지옥훈련을 해야 할 신진급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마무리훈련에서는 잘 훈련하는 것 만큼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 지친 심신을 달래고 내년을 위한 체력도 만들어야 한다”면서 기술 훈련은 물론, 체력 훈련도 중요시했다. 여기에 몸이 조금이라도 아픈 선수가 있으면 일단 훈련에서 제외하며 상태를 살폈다. 보통은 선수들이 요령을 피우는 것이 대부분인데, “뛸 수 있다”는 선수들을 코칭스태프가 제지하는 재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전유수와 여건욱이 그런 경우였다. 올해 많은 경기, 그리고 많은 이닝을 소화한 전유수는 코칭스태프의 특별 관리를 받았다.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다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곧바로 훈련에서 빠졌다. 전유수는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강제휴식이 더 힘들다”라며 울상이었다. 허리를 살짝 삐끗한 여건욱도 캠프 중반 강제휴식의 대상자였다. 여건욱도 “그러다 재활군으로 내려간다”라는 선배들의 말에 “절대 아닙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며 억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강도 높은 수비 훈련 중 손목을 살짝 다친 김성현, 박계현은 이로인해 타격 훈련에서 빠지게 되자, 불안해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코칭스태프의 명령은 “일단 쉬어”였다.
대개 5일 훈련, 1일 휴식으로 캠프 일정이 이뤄지다보니 휴식일에 잘 쉬는 것도 중요했다. 그 휴식일에는 코칭스태프가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코칭스태프의 눈을 피해 ‘원정 골프’를 감행하던 선수들도 있었지만 김 감독은 “오히려 그렇게 몰래 도망가다가 사고가 난다.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상쾌한 환경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골프를 치는 게 훨씬 낫다”라며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번 마무리훈련이 열린 센다이시는 가고시마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가고시마시와도 신칸센으로 15분가량이 떨어진 동네다. 인구는 약 10만 명. 상점은 오후 7시가 넘어가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신용카드도 받는 곳이 거의 없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자연히 선수들은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휴식일에 시간을 내, 가고시마 시내에 다녀오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갔다 온 선수들은 대부분 “그다지 볼 것이 없다. 그냥 쇼핑하고 밥만 먹고 돌아왔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다보니 아예 외출을 포기하고 말 그대로 푹 쉬는 ‘방콕파’도 많았다. 대표적인 '방콕파'였던 여건욱은 “오래간만에 늦잠도 자고, 한국에서 담아온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 원래 밖에 잘 나가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호텔 안에 위치한 온천은 이런 방콕파들의 좋은 벗이었다. 선수단 및 코칭스태프 전원은 캠프 종료를 약 1주일 앞두고 고기집에서 전체 회식을 갖기도 했다. 2시간 동안 SK 선수단이 먹은 액수가 고기집의 한 달 매상보다 더 높았다는 후문이다.
김태우 OSEN 기자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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