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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DREAM' SK 와이번스 나주환

SSG 랜더스 2014. 8. 6. 14:45

2013년 4월 21일 문학 야구장 전광판에는 ‘나주환’이라는 반가운 세 글자가 떴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주전 유격수로 SK 왕조를 든든히 지킨 나주환이 대한민국 남자의 의무를 다하고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함성 가득한 문학구장에 선 그의 마음도 들떴다. 하지만 2년간의 공백은 그의 타격 밸런스를 무너뜨렸고, 허벅지 부상까지 악재가 찾아왔다. 2014시즌,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지난 6월 4일, 그가 1,434일 만에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발판의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을 향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Photographer Lee Yong Han Editor Somin Park Location Munhak Baseball Stadium



‘야구선수 나주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구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는 두 형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직접 야구 방망이를 깎았다. 세상의 빛을 본 두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야구를 시작했다. 둘 다 소질은 있었지만, 끝까지 버틴 건 둘째 나주환이었다. “아버지가 야구를 정말 좋아하세요. 그래서 형제 둘이 야구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 야구부면 정말 많이 맞았거든요. 형은 그걸 못 참고 그만두었어요. 저는 맞으면서도 야구가 재밌어서 계속 했거든요. 형도 여전히 야구를 좋아해서 생활 체육 야구에서 투수를 하고 있는데, 야구 계속 했으면 저보다 잘했을 거라고 매일 그래요. (웃음)”


첫 대답부터 나주환의 유머감각이 돋보였다. 그가 라커룸 분위기 메이커라는 점은 이미 선수들과 팬들 사이에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주환은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다. “정말 무서운 선배였는데요. (웃음) 그래서 제가 요새 힘듭니다. (이유를 묻자) SK 와이번스 김승희 전력분석 코치님이 제가 3학년 때 1학년이었던 후배거든요. 예전에는 ‘승희야’라고 부르면 라면을 끓여오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승희야’라고 부르면 ‘코치님이라고 부르셔야죠”라는 말이 나온다니까요. 동문회 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군기반장이기도 했지만, 천안북일고를 이끈 4번타자였다. 나주환이 이끈 2002년 천안북일고는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쓸어 담았다. “멤버들이 좋았죠. 제 덕은 아닙니다. (웃음)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게 있어요. 그때 야구부 숙소가 지은 지 20년 정도 되어서 정말 낡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전국대회 우승을 하면 새로운 숙소를 지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졸업하고 가보니까 정말 숙소가 새로 지어졌더라고요. 뿌듯했습니다.”


그 시기는 나주환 개인적으로도 많은 다짐을 한 시기였다. 재미있어서 야구 배트를 잡았던 나주환이 고등학생이 되자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지명을 받지 못한 선배 중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그때 진로에 대한 걱정이 들어서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결론은 최선을 다해서 지명을 받자고 생각했어요. 단순하지만 그게 답이었던 것 같아요.”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03년 2차 지명 2라운드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선수의 꿈을 이룬 것이다. 차근차근 1군에서 백업으로 나와 나주환이라는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SK 와이번스의 이대수와 트레이드였다. “김경문 감독님이랑 단체 미팅을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서운했죠. 마음 추스를 시간도 없었어요. 바로 SK 와이번스 매니저에게 전화가 와서 몇 시까지 인천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가니까 유니폼을 주시더라고요. 바로 연습을 시작했죠. 다들 모르는 사람들이고, 어제까지만 해도 경기의 상대였는데 낯선 기분이었어요. 그때 도움을 많이 준 게 지금은 KIA 타이거즈에 있는 (송)은범이었어요. 대표팀 하면서 친해졌는데, 집을 구하는 것부터 많은 도움을 줬죠.”


그런데 사람 인연이 참 묘하다. 2014년, 나주환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이대수와 나주환이 한 팀에서 만난 것이다. 지난 6월 2일 조인성과 트레이드로 이대수가 7년 만에 SK 와이번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같은 내야수기에 그에게는 자극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트레이드되고 초기에는 어제 대수 형이 안타를 쳤는지 기록지 찾아보고 그랬어요. (웃음) 그런데 이제는 정말 친한 형이에요. 얼마 전에 한화랑 경기하면서 대수 형 방망이를 뺏어온 적도 있었는데, 다시 한 팀에서 만날 줄은 몰랐죠. 경쟁상대라기보다는 팀에서 함께 가야 할 존재인 것 같아요. 고참이 팀에서 중심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지금 SK 와이번스에서는 저나 정권이 형 등이 그런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게임 때마다 저도 조언을 많이 해주고요. 그런데 이제 대수 형이 왔으니까 그런 역할도 잘해줄 것 같고요. 저희 팀 자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 같아요.”


2007년 유니폼을 갈아입은 나주환은 수비 실력의 안정과 함께,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나주환이 주전 유격수로 우뚝 서는 동안, SK 와이번스도 자연스럽게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2007 시즌부터 2010 시즌까지 4년 동안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며, 그중 2009년을 제외한 세 번의 시리즈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09년에도 명승부 끝에 2위를 차지했다. 나주환도 그때를 잊을 수 없다. “2010년 시즌이 특히 기억이 남아요. 그때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열심히 시즌을 보냈는데, 부상 여파 때문에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거든요. 최종 엔트리 발표가 난 다음 날, 김성근 감독님이 저를 부르셔서 일주일만 쉬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경기에 나갔는데 그날 실책을 두 번 하고 교체됐어요. (웃음) 창피했죠. 그리고 한국시리즈를 하는데 다시 감독님이 부르셨어요. 아시안게임은 아쉽지만 여기서 우승하는 것도 큰 의미다. 그래서 더 과감하게 플레이했던 것 같아요.”


경험하기 힘든 한국 시리즈를 연속으로 네 번이나 참가하면 긴장이 덜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나주환은 고개를 젓는다. “후배들이 한국시리즈 때 어땠냐고 질문을 하면 ‘야, 뭐 별거 없어’ 이러는데, 사실 너무 긴장되죠.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랑 3차전까지 전승을 하고 4차전을 치르는데도 정말 떨려요. 나 하나 때문에 선수, 코칭스태프, 프런트, 팬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하는 부담감이 큰 것 같아요. 그래도 박경완, 김재현 선배님들이 항상 다독여주셨어요. 어차피 시리즈가 끝나고 일주일만 지나면 어떤 팀이 우승했는지, 누가 뭘 했는지 다 잊는다. 항상 했던 대로만 하자고 해주셨죠.”



우승의 추억을 안은 나주환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기 위해 2년 동안 그라운드를 떠난다. “처음에 공익을 갔을 때는 솔직히 좋았어요. 20살 때부터 프로에서 뛰었고, 운이 좋게 1군에서 백업, 주전으로 항상 시합을 나가서 행복했지만 한 편으로는 제 생활이 없었거든요. 친구도 못 만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공익을 가서 세 달간은 야구도 안 보고 놀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게 참 병인 것도 같은데 어느새 야구를 틀고 SK 와이번스 경기 결과를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중계로 다른 선수들 보면서 나도 저랬을까,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운동장에 나와서 연습도 많이 했어요.” 그는 2년 후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2013년, 그가 돌아왔다. 하지만 생각대로 시즌이 풀리지 않았다. 떨어진 타격감과 부상까지 겹치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결국, 2013년 단 15경기에 나오면서 시즌을 일찍 끝마쳤다. “저는 제 자신이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전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주전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 악물고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주전이라는 자리에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해야 했던 거죠. 팀도 팬들도 기대가 참 많았는데 부상이랑 겹치면서 기량을 못 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작년 겨울부터 정말 준비를 많이 했어요. 올해에도 아직 성적이 좋지는 않은데 저 나름대로는 아프지 않고, 점점 올라갈 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결국, 시즌을 일찍 마무리한 나주환은 교육리그 통보를 받는다. 신인들이 주로 가는 교육리그기에 서운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일인데, 당시에는 서운했죠.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하다가 이광근 코치님께서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까 가라고 조언해주셔서 마음을 돌렸죠. 그래도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요. 정말 SK 와이번스 프런트가 대단한 게, 교육리그 말을 꺼내고 이틀 후 아침 8시 비행기 표를 끊어주더라고요. 와이프한테 일주일 후쯤 미국 갈 것 같다고 얘기를 했는데 바로 짐 싸서 출발했죠. (웃음)”


미국에 도착한 나주환은 혹독한 훈련을 한다. “당시 김용희 퓨처스 감독님이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 감독님과 특별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는데, 제 마음을 털어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저에게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교육리그를 거친 나주환은 마무리 캠프, 스프링 캠프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며 다잡았다.



그리고 벼르던 2014 시즌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2014 시즌은 새롭다. 기존에 수비위치였던 유격수에서 2루수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2루수로 연습하는데 정말 쉬웠어요. 시간이 지나니,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 것과 포메이션이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또, 제가 유격수로서 가지고 있던 데이터가 이제는 소용이 없잖아요. 2루수 자리에서 이 타자의 공이 어느 쪽으로 많이 가는 성향인지,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2014 시즌이 끝나고 나주환은 FA에 해당하기 때문에 부담도 크다. “FA가 되게 힘든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야구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그런데 지금 저를 비롯한 FA 해당 선수들은 한 타석에 목숨을 매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인생에 한 번뿐인 기회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시즌 초에 성적이 안 좋을 때, 정말 힘들더라고요. 불안하고, 매일 폼도 바꿔보고요. 근데 이제 50경기 정도 치르니까 좀 덜해요. 신경 쓰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니까 다시 야구가 부담스럽지 않고 재밌어진 것 같아요.”


올 시즌 그의 수비위치 말고 변한 게 하나 더 있다. 결혼식을 올리고 맞이하는 첫 시즌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누군가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감이 생겼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힘이 많이 돼요. 총각 때는 야구가 안 풀리면 밖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그랬는데, 이제는 집에서 위로를 받아요. 그런데 요즘 와이프가 야구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어요. 야구는 적당히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웃음)”


그래서 지난 4월 29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발생한 오심 논란도 더욱 속상하게 느껴졌다. 그날, 상대 투수 한승혁이 던진 공이 나주환의 손등을 강타했고, 주심은 사구를 판정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에 그 모습이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경기를 지켜보는 중계진과 기자들은 단지 영상만으로 오심을 확정 지었다. 당시 프로야구 오심 논란이 매일 벌어지던 시기였고, 주심과 함께 맞은 척 연기를 한 격이 되어버린 나주환도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카메라가 아무리 좋아도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되는 정도가 있거든요. 심판도 확실히 보고, 포수였던 (차)일목이 형도 제 손을 확인했어요. 그런데 기사에서는 안 맞았다고 확정을 지었더라고요. 손은 아프고, 너무 억울했어요. 만약 결혼하기 전이었으면 참고 넘어갔을 것 같은데, 와이프가 기사랑 댓글을 보고 너무 속상해하더라고요. 그걸 보는 저도 속상하고요. 나중에 제 딸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죠. 다음날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고 싶어요.”



‘아빠 나주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보니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 OBS 프로그램 ‘불타는 그라운드’에 나온 인터뷰이다. 그는 아들을 낳으면 야구를 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좌완투수를 시켜서 FA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결혼하고, 첫째 딸까지 낳은 상황에서 그 다짐은 변함이 없는지 질문했다. “(웃음) 아, 지금은 안 그래요. 이제는 딸을 예쁘게 키워서 FA 대박 나는 선수한테 시집을 보내야 해요. 예전에는 (최)정이 같은 애한테 보내야지 했는데, 요즘 정이면 안 돼요. 요즘 정이가 약해진 것 같아서요. (웃음) 농담이고요.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야구를 시키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요즘 야구하는 환경도 정말 좋아졌고, 본인만 원한다면 지원해줄 생각입니다. 사실 와이프는 반대하는데, 제가 영상에서 뱉은 말은 지켜야죠. (웃음)”


인터뷰 내내, 가족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아내에게 한 마디 남겨달라는 요청을 하자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이 운동선수와 결혼하는 걸 좋게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아니에요. 혼자 아이를 키우고, 트레이드되면 바로 이사 가야 하고요. 제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도 늦고, 훈련으로 집도 자주 비워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죠. 그 고마움을 제가 두고두고 보답할 거예요. 와이프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많이 되니까 지금처럼만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네요. 사랑한다!”


무거워진 책임감만큼, 남은 시즌에 대한 각오가 대단하다. “힘들었던 일 년에 대한 보상은 4강이 아니고 우승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잘하면 될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하는 팀 선수들이 모이면 성적은 자연스럽게 오를 거라 믿습니다. SK 와이번스는 큰 경기를 많이 해본 팀이고, 지고 있더라도 경기도 뒤집을 힘과 전통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요.”



SK 와이번스와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말을 전했다. “작년 시즌을 아쉽게 마무리하고, 올해도 저희 성적이 팬들의 기대만큼 좋지 않은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선수들은 아직 포기를 안 했어요. 지금은 부상자도 많아서 힘든 경기를 하고 있지만, SK란 팀은 힘과 저력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요. 응원 많이 해주시면 저희 선수, 코칭스태프 모두 힘내서 웃으면서 시즌을 끝낼 것 같아요. 많이 와주셔서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주환이 어떤 야구 선수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고민하다가) 믿음을 주는 선수요. 화려한 플레이가 팀과 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실수하지 않고, 안정된 플레이를 선보이는 거예요. 평범한 타구를 놓쳤을 때, 투수의 힘이 빠지고, 그러면 팀이 힘든 경우로 나아가기 쉽거든요. 제가 있는 쪽으로 타구가 왔을 때 투수, 벤치, 팬들까지 무조건 아웃이라는 믿음을 주는 선수로 남고 싶네요.”



***

1,434일 만에 홈런이었다. 단순한 홈런이 아니었다. 두산에게 3-0으로 끌려가던 중에 터진 추격의 발판이었다. 그리고 5회 나주환은 앞서가는 두산과 동점을 이루는 희생플라이를 쳤다. 다시 두산이 점수를 냈지만, 결국 SK 와이번스는 김강민의 끝내기로 기분 좋은 승리를 가져왔다. SK 와이번스만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 대표적인 경기가 아닐까.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한다는 나비효과처럼, 나주환의 부활을 향한 날갯짓이 SK 와이번스의 반등이라는 폭풍우를 가져오길 기대해본다.


출처 : 'DUGOUT'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