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더스 스토리/랜더스人

'DUGOUT INTERVIEW' 박경완 퓨처스팀 감독

SSG 랜더스 2014. 1. 29. 13:52



‘선수’ 박경완의 23년은 화려했다. 4차례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2000년과 2004년에는 두 차례 홈런왕에 올랐으며, 국가대표팀이나 소속팀에서 그를 만난 투수들은 한 목소리로 26번을 단 그에게 깊은 신뢰를 표했다. 그렇게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박경완이 은퇴를 결정했을 때, SK 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놀라움과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은퇴한 그가 퓨처스팀 감독으로 새 출발한다는 소식은 팬들을 더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은퇴 후 코치연수나 코치 데뷔가 아닌, 감독으로의 데뷔였기 때문이다. 과연 박경완은 야구인생 2막의 초석을 어떻게 다질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감독으로서 데뷔전을 갓 치른 시점, 박경완 퓨처스팀 감독을 만나보았다.

Photographer Lee Yong Han Editor Hong-Kweon Jeon Location Munhak Baseball Stadium


인터뷰에 앞서 감독이 된 그에게 데뷔에 대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축하에 답했다. “저도 그렇고, 주변 분들께서 이게 축하를 해줘야 하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히려 축하해줘도 된다고, 축하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은사님들께도 연락드렸었는데, 김성근 감독님께서는 ‘감독은 선수보다 먼저 운동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퇴근해야 하는 자리다. 힘들고 고독한 자리인 만큼 인내력을 가져야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고, 항상 지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죠. 조범현 감독님은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너의 은퇴 후 행보가 프로야구사에서 없던 일인데,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물어보셨어요.” 사실 감독직을 수락했지만,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한 박 감독. 하지만 선수시절의 그가 23년간 안정적인 투수 리드로 배터리가 함께 좋은 결과를 얻었듯, 지금도 본인이 잘 해야 자기 자신도, 팀의 미래도 좋은 결실을 맺지 않겠냐는 그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깊은 고민 끝에 내린 선수생활 은퇴이자 감독직의 결정이었기에 박 감독은 조심스레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에요. 심지어 식구들에게도 결정하기 전까지 감독 제의가 들어온 것에 대해 함구했었죠. 솔직히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제가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는 작년에도 같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한 해만 더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고민을 올해에도 하게 되자, 미련은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단호하게 은퇴의 길을 택했다. “선수가 감독의 기대치에 못 미치면, 천하의 박경완, 천하의 이승엽일지라도 기용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년의 경우에는 이런 걸 못 느끼고 감독님을 원망했었는데, 올해 들어서 왜 감독님 탓으로만 생각했는지 반성하게 되었어요. 잠깐의 기회는 올해에도 분명히 있었어요. 그 기회를 잡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봐요.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은퇴 결정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퓨처스팀 감독일지라도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 은퇴 후 바로 감독이 되는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박 감독 역시 본인이 최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를 쓴다는 느낌, 자신이 잘 되면 자신의 후배들에게 모범사례로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23년 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연습생으로 프로 선수의 삶을 시작했을 때처럼. “어느 날,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준비된 감독과 준비되지 않은 감독’ 과연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지, 과연 코치연수나 코치 경험 없이 바로 감독이 되는 이는 준비되지 않은 감독일지 말이죠. 그러다 보니 순간적으로 도전정신이 생겼어요. 제가 퓨처스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어 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을 때, 뒤에 은퇴할 후배 선수들도 은퇴 직후 감독직을 맡을 수 있는 길을 열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면, 안되더라도 후회 없이 해보고 싶어요. 처음 프로에 입문했을 때도 연습생으로 시작했었잖아요?”


사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포수라 평가받는 박경완을 선수로서, 혹은 코칭스태프로서 원하는 구단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인천과 SK는 제2의 고향 같은 팀이었기에 쉽게 떠날 수 없었다. 파격적인 감독직 제안도 주효했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SK를 제외한 팀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프로 선수로 23년 동안 쌍방울, 현대, SK에서 뛰었는데, 앞서 두 구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오래 몸담은 팀이 SK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와 정도 많이 들었어요. 다른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했더라도 코치 생활은 이 팀에서 하고 싶었어요. 다른 구단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 후배들에게 애착이 더 많이 갈 것이고, 제 노하우를 더 깊게 전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박 감독이 SK를 떠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중학생 시절부터 그와 배터리를 이루었던 친구 김원형 코치일 것이다. 김 코치는 지난 시즌까지 3군에 있다가 올 시즌 1군으로 올라왔다. 그는 은퇴를 고민했던 박 감독에게 최대한 오래도록 선수로 남아있으라는 조언을 했다. 코치로서의 삶을 잘 이해하는 그는 죽마고우의 말에 매우 공감이 갔다. “여러 선수들을 일일이 봐줘야 하는 점도 그렇고, 예를 들어 9시 훈련이 잡혔다고 치면, 코칭스태프는 8시 이전에 나와서 미팅을 통해 준비를 해야 하고 선수들보다 늦게 일과를 마치니까요. 하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아니, 힘들 수 없습니다. 최대한 기존 퓨처스 선수, 신인 및 신고선수, 그리고 재활군에 있는 선수를 모두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죠.”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박 감독은 한화 퓨처스팀과의 데뷔전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연습생의 심정으로 임했다며 경기를 복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신인 선수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경기 중간에 선수교체를 결심했는데, 실수로 주심에게 통보를 안 한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은 실수죠. 그리고 연습경기지만, 전날 밤 타순을 짜는데도 밤을 새며 감독의 고민과 스트레스를 온 몸으로 느꼈죠. 덕분에 몸살이 걸려서 한동안 고생했습니다. 하하하. 그 날 경기는 신인 선수 위주로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하지만, 스포츠 세계에서 이기고자 하는 열망은 당연한 겁니다. 내년 시즌에 돌입하기 전까지 철저히 준비해서 승리를 거두는 날이 많아져야죠.”


또한 그는 자신의 신분이 선수에서 감독으로 바뀌면서 후배로 부르던 선수들이 한순간에 제자가 되었다. 서로 어색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선배님’으로 불렀던 후배들이라서 그런지 ‘감독님’ 소리를 잘 못하더라고요. 저 역시도 어색했었죠. 하지만 그 어색함도 3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눈 녹듯 풀리더라고요.” 그를 보좌하는 코치들도 그의 감독직 시작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선배, 심지어 신인시절의 박경완을 조련했던 코치도 있는 코치진은 감독으로서의 후배를 존중함과 동시에,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도전하는 자세를 잃지 말라는 마음으로, 무모해보일 수도 있는 그의 의사결정에도 박수를 보내주고 있다.


또한 SK 프런트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박 감독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그보다 야구 후배이고 프로무대의 코치경력이 일천한 코치들을 신입 코치로 영입하며 그의 동기부여를 유도한 것이다. “구단에 감사하죠. 저와 후배 코치들은 서로가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만족을 모른다는 자세로 지도에 임하고 있어 앞으로도 시너지 효과가 클 거라고 봅니다.”



박경완의 2군 감독 임명으로 포수 출신 프로야구 감독이 하나 늘었는데, 최근 포수 출신 감독들의 호성적으로, ‘명포수 출신 감독은 모두 명장’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OB 베어스에서 안방마님 경쟁을 하던 김경문 감독과 조범현 감독은 각각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명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 감독도 포수로서의 경력이 감독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포수가 명감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성급한 일반화는 지양하는 모습이었다. “류중일 감독님은 유격수 출신으로 팀을 3년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은 명장이신데, 그렇다고 유격수 출신 감독만이 명장은 아니잖아요? 다만 포수로서의 경력이 감독 생활에 장점이 될 수 있으니, 이를 토대로 앞으로의 감독 생활을 잘 설계해 봐야겠지요.”


또한 많은 팬들은 명포수 출신인 박 감독에게 ‘제2의 박경완’을 육성하길 바란다. 하지만, 현재 그의 직책은 감독이다. 포수 육성은 대개 배터리 코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감독은 감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해요. 배터리 코치가 있는데 저만의 방법론을 내비치는 것은 분명히 월권입니다. 각자 생각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예요. 그리고 박철영 배터리 코치님은 포수 육성 경력이 풍부하신 분이세요. 설령 후배 코치가 배터리 코치였더라도 월권은 잘못된 방법이죠. 감독이라는 권한 안에서,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코치님과 상의 후에 결정할 생각입니다.”


포수 육성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 프로야구계 전체에서 아쉬워하는 ‘대형포수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대형 포수 부재를 논하기에 앞서, 간절함을 잃지 않았던 자신의 23년 선수생활을 복기했다. 그는 그 속에서 이 주제의 답을 찾았다. “저는 지금까지 야구를 해오면서 제 자리를 지킬 의도로 임한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간절하게, 이것 아니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죠.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무조건 내 자리를 지킨다고 다짐했어요. 만약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체 선수가 2경기 이상 좋은 활약을 보인다면, 감독 입장에서 당연히 인상 깊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마저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지금 KT에 계시는 조범현 감독님께서 쌍방울 배터리 코치로 계셨을 때, 신인이었던 저를 선수로서 아주 강하게 키우셨어요. 대화가 잘 통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나침반 같은 존재였죠. 하지만 97년 현대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어요. 9억이라는 트레이드 머니도 부담감으로 다가왔었죠. 그 때 생존본능이 생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프로에는 그러한 생존본능을 가진 포수를 찾아볼 수 없어요. 롯데의 강민호, 삼성의 이지영, 그리고 저희 팀의 정상호 등 차세대 명포수가 될 수 있는 재목들은 상당히 많아요. 반면, 비단 이 선수들에 국한하는 말은 아니지만, 요즘 후배 포수들을 보면 대개 유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수라는 자리는 다른 포지션보다 부상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어요. 이를 참고 일어나야 팀의 수비시간이 줄고, 투수와 다른 야수들이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투지를 보여주지 않는 포수들이 있어요. 그런 선수들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팀을 힘들게 하는 선수들이죠.”


그렇다면, 과연 감독 첫 시즌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우선, 23년간의 선수생활에서 마주한 선배 지도자들을 떠올리며 최선의 지향점을 찾는 게 그가 생각하는 첫 번째 목표다. “프로 생활동안 여러 감독님들을 만나 보았어요. 그 분들의 장단점을 감히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저만의 관점을 통해 좋은 부분을 취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물론 어떤 감독님의 스타일을 닮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상당히 많은데, 이는 누군가를 따라가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경험을 통해 만들어 가야 할 문제죠.”


그의 지도 방침은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만 퓨처스팀에 소속된 다수의 유망주의 기량을 끌어올려 1군의 대체자원으로 발탁하고, 1군에서 재정비를 위해 내려온 선수들을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올려 보낼 뿐이다. “감독직을 수락한 후 이만수 감독님을 찾아가 뵈었는데,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퓨처스팀 감독으로서 제가 해야 할 부분이죠. 다만 아직 능력이 다른 선수들이기 때문에 저의 선수생활을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개개인에 맞추어 지도해야한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2년간 재활군과 퓨처스팀을 오가며 1군과의 차이점을 몸소 느낀 게 큰 경험이 되었죠. 신인 시절에 경험했던 퓨처스 생활을 선수 생활 말미에 다시 느꼈고, 시대가 달라졌음을 느꼈어요. 요즘에는 선후배간의 무조건적인 위계질서를 강조하기보다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줄 아는 선수들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느꼈죠. 이뿐만 아니라 1군 선수들을 여러모로 지원해 주는 것도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훈련의 강도는 높일 생각입니다. 초심을 갖고 임하고 있기에 의욕을 갖고 있고, 제가 생각하는 훈련의 강도가 있기 때문에 혹독하게 해 볼 생각이에요. 많은 연습이 모두를 발전시키지 못하겠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박 감독은 선수시절 자신의 등장음악과 응원가를 기억한다. 문학 야구장 3루에 있는 가로 전광판에 ‘26, 포도대장 박경완’이라는 문구까지 말이다. “다른 시즌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참 많았지만, 저는 올 시즌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1군에 올라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그 어떤 선수보다 저를 환호해주셨던 팬 여러분들이 눈에 선해요. 선수 생활 막바지에 더욱 더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팬 여러분들의 사랑이었죠. 사실 팬분들 때문에라도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실한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고, 운동장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죠. 그라운드에서 ‘선수 박경완’의 모습은 이제 보여드릴 수 없겠지만, ‘지도자 박경완’도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는 문학 야구장 내야에 있는 ‘314’라는 숫자판을 보며 회상에 잠겼다. 314는 그가 23년 간 친 홈런 개수로, 홈런이 야구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야구를 꾸준히, 그리고 잘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숫자다. 이 모든 걸 다시 할 수 없는 게 내심 아쉽다는 박 감독이다. “그걸 보면서 제 자신에게 이야기했죠. ‘너 참 고생 많았다.’ 제 인생의 4분의 3을 야구에 바쳤어요. 42살인데, 33년 동안 야구를 했어요. 저기 적혀 있는 숫자도 중요하겠지만, 제 인생의 전부인 야구를 하면서 고생 많았고, 잘 견뎠고, 잘 이겨내서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었죠. 314라는 숫자,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선수로서의 수많은 경험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개척해나가야겠죠?”


프로야구 팬이라면 이 소식이 아쉽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하지만 감독으로서 야구인생의 2막을 여는 그를, 선수시절의 그보다 더 응원해줄 때다. 그리고 그에게는 초심으로 빛나는 열정과 야구인생에서 느꼈던 간절함, 그를 보좌하는 선후배 코치진, 그리고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팬이 있다. SK의 미래, 그리고 은퇴 선수들의 새로운 미래를 열 ‘감독’ 박경완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보자.


출처 : 'DUGOUT'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