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후반 메이저리그는 10여년만의 ‘대 홈런 시대'를 열어젖힌다. 1년 반이 지난 2017시즌, 시즌 홈런 개수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홈런 홍수 현상은 극에 달했다. 그 배경에는 넓어진 스트라이크 존과 수비 시프트 유행으로 인해 더이상 단타로는 많은 득점을 얻어내기 어렵다는 변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조용히 시작됐다. 스트라이크 존의 확장과 함께 탈삼진이 늘어나고, 볼넷이 줄어들면서 투수들의 역습을 위한 제반 환경이 조금씩 갖춰지게 된 것이다.
다시 SK로 시선을 옮겨보자. 사실 SK의 홈런 혁명은 미국의 상황과는 다른 지점에서 시작됐다. 한국의 야수들은 미국 선수들처럼 넓은 수비 범위를 갖고있지 않다. 한국의 투수들은 미국의 투수들처럼 구속이 빠르지 않다. 따라서 삼진을 당할 확률도 낮고, 땅볼을 쳐도 안타가 될 확률이 높다. 미국처럼 ‘강렬한 한방’을 노려야 할 동기가 많지 않은 것이 KBO리그의 토양이었다. 다만 SK에게는 한국에서 홈런을 치기에 최적격인 홈구장이 있었다.
홈런을 생산하기에 어느 팀보다 유리한 환경. 게임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뽑아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플레이를 만들기 최적의 환경. 그것이 SK를 홈런 공장의 길로 이끌었다. 2016년 정의윤 트레이드를 통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SK의 계획은 2017년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2017년, 상황이 또다시 달라진다. 스트라이크 존이 넓어지면서 득점 환경이 다시 달라진 것이다.
늘어난 삼진, 줄어든 볼넷. 이것이 지난해 KBO리그 뒤편의 보이지 않는 변화였다. 간단하게 요약해, 투수들에게 좀더 유리한 환경이 마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KBO리그의 최근 추세는 ‘늘어나는 탈삼진과 줄어드는 볼넷’이다.
사실 이 변화는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경기당 5점이 넘는 득점 잔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시즌에도 타자들은 ‘스트라이크 존이 넓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규칙에 맞게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 심판진의 공식적인 견해지만, 결과만 봤을 때는 투수가 좀더 나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실제로 리그 전체의 평균자책점은 최근 5년 중 가장 낮은 4.87을 가리키고 있다.
늘어난 삼진, 줄어든 볼넷. 넓어진 스트라이크 존. 기시감이 느껴질 법도 하다. ‘플라이볼 레볼루션’이 대두되기 전, 메이저리그의 추세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근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들을 중심으로 투수의 빠른 공 평균 구속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한가지 차이점은 내야 시프트 전략이 아직까지는 KBO리그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시프트 시행 횟수는 2012년 6천여 타석에서 2017년 3만여 타석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KBO리그에서는 시프트 횟수가 정확하게 집계되고 있지 않지만, 현재 SK를 제외하면 내야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팀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여기서 내야 시프트 전략이 성공적으로 리그 전반에 퍼진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득점 감소 추세가 이어졌던, 2012~2014년 메이저리그의 환경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이런 변화 속에서 삼진을 감수하는 대신, 강한 타구와 장타를 추구해 ‘한 방'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실패한 사례도 있지만 이제 ‘강한 타구'와 ‘땅볼 대신 잘 맞은 뜬공과 라인드라이브'는 타자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선택지가 됐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SK 역시 비슷한 처방을 실천하고 있다.
3년째 SK의 아이덴티티가 되고 있는 이 전략은 3년차를 맞이해 좀더 강력하게 변모했다. 지난 2년간 SK 타선의 약점은 부족한 다소 부족했던 출루율과 득점권의 집중력이었다. 한 방이 터지는 것은 좋았지만 볼넷을 적게 얻어내며 누상에 주자를 자주 올려놓지 못했다. ‘득점권에 특별하게 강한 타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 현대 야구의 컨센서스라지만, 결과적으로 낮게 나온 득점권 타율은 아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 SK 타선은 리그에서 가장 자주 볼넷을 얻어내고 있고, 득점권에서도 3할 가까운 타율을 유지하며 끈적끈적한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런 발전 속에서 3년 연속으로 타석당 홈런 생산률 단독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대로 팀 1위를 수성한다면 KBO리그 37년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팀 타석당 홈런율 1위'라는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장타력의 메리트를 잃지 않고 약점을 보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 SK가 장기적인 로드맵 수립과 실천에 성공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10년 전 SK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강력해진 것처럼, 오늘의 SK 타선도 한 해가 거듭될수록 더 강하게 변모하고 있다. 10년 전 SK는 도루와 불펜을 앞세운 ‘토탈야구’로 트렌드 세터가 됐다.
우연의 일치일 지도 모르지만, 홈런을 앞세운 현재 SK의 공격 전략도 다시 KBO리그의 트렌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아니면 반대로 시대의 흐름이 SK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선후 관계를 뒤집어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SK 타선의 지향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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