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장에서 경기만 보던 시대는 지났다. 선수와 팬의 자부심을 높이며 지역시민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인천 문학야구장.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바람직한 롤모델로 통하는 문학야구장은 지금도 여전히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김종진(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실내건축설계학과 교수) 사진 한수정(Day40스튜디오) 촬영 협조 SK와이번스

 

그리스 아테네 파나티나이코(Panathinaiko) 경기장. U자 모양으로 크게 입을 벌린 경기장 내부가 보인다. 기원전 4세기 고대 축제의 장()에 다시 지어진 이 경기장에서 1896년 사상 첫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아이보리 빛깔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경기장은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은은한 우윳빛을 내뿜는다. 계단식 관람석은 부드럽게 휘어지며 타원형경기장을 감싸 안는다. 가만히 관람석을 따라 걸으니 트랙을 달리고 결투를 벌이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얼굴에서 땀이 튀고 온몸의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한 선수가 쓰러지자 상대편 선수가 양손을 치켜든다. 관중의 함성은 극에 달한다.

 

시대 불문, 경기장 건축의 본질을 잇다


1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은 경기장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다.

원형경기장은 모임과 관람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공간 형식에서 유래한다.


20여 년 전 방문했던 아테네 경기장의 추억이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은 경기장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다. 바로원형극장(또는 원형경기장, Amphitheater)’이다. 가운데 공간에서 연극과 경기, 결투가 벌어지고 관중은 그 주변에 둘러앉아 관람하는 구조다. 뒤에 앉은 이들의 시선을 확보하기위해 좌석 높이를 올려 자연스레 계단식 원형경기장이 만들어졌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모임과 관람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 움푹 파인 자연 지형을 이용하거나 평지에 돌을 쌓아 인공 건축물을 지었다. 네덜란드 건축가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는 원형극장을근본 건축 형식 중의 하나라고 표현하며 다이어그램을 사용해 이를 설명한다


그림 2와 같이 왼쪽은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그릇 모양이고, 오른쪽은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엎어놓은 그릇 모양이다. 두 형상에 사람들이 앉으면 왼쪽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며 모여 앉고, 오른쪽에서는 등 돌리고 밖을 향해 앉는다. 즉 원형경기장은 모임과 관람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공간 형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원형경기장이 담는 콘텐츠와 그 건축적 결과는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때로는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결투장으로, 때로는 정치를 풍자하는 희비극 연극무대로 쓰였다. 근대에는 스포츠로 세계가 뭉치는 올림픽 무대가 되기도 했고, 현대에는 가수들의 현란한 콘서트장이나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패션쇼 무대로 변신하기도 했다. 원형극장의 기본적인 공간 구조는 그대로 남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문화적인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게 진화한 것이다.


잔디 위에 드러누워 경기를 관전하다니


완만한 곡선의 그린존.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가장 선호하는 공간으로 

공원에 소풍 나온 듯 푹신한 잔디 위에서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문학야구장은 3만여 석 규모의 좌석을 11개의 특화된 좌석으로 리모델링했다

특히 외야 파티데크는 4명 이상이 둘러 앉아 경기를 볼 수 있어 가장 먼저 매진되는 인기석이다.


SK와이번스의 정규리그 경기가 있는 날, 인천 문학야구장을 찾았다. 문학야구장은 2002년 문을 연 SK와이번스의 홈구장으로 한 번에 약 28,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평일인데도 관중의 열기가 뜨겁다. 투수와 타자의 동작 하나하나에 관중의 함성과 치어리더의 응원이 경기장 양편을 오가며 메아리친다.


문학야구장 역시 원형극장의 건축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곳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구장과 다른 점이 하나둘 눈에 띈다. 우선 외야 전광판 아래에 있는 소나무 숲과 왼편의 잔디밭이 이색적이다. 야구장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공간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외야 왼쪽 상단에 좌석 대신 푸른 잔디를 깔아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그린 존이다. 야구장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에서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으며 경기를 관람한다. 어린 아이들은 제집처럼 맨발로 뛰어논다. 뒤편의 초가 정자 옆에는 그늘막 텐트를 친 가족도 있다. 정자와 텐트 속에 드러누워 야구경기를 보다니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쉽사리 떠올리지 못할 만한 풍경이다.


반대편으로 가보자. 호프집에서나 볼 수 있는 긴 나무 테이블과 벤치가 보인다. ‘파티덱바비큐존이다. 일명삼겹살존’. 지글거리는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야구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이다. 문학야구장을 둘러보노라니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경기장의 명물 핫도그를 먹으며 경기를 보던 저녁. 잘 구운 소시지 기름 냄새와 그 위에서 녹아내리는 치즈 냄새, 클럽 음악 같은 흥겨운 응원가, 수만 뉴욕 관중들의 함성이 모든 것이 무척이나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반대로 외국인이 문학야구장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야구를 보면 어떨까? 노릿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마늘을 쌈에 싸서 먹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경기를 본다면 양키즈 구장에서의 경험만큼이나 강렬한 문화적 체험이 되지 않을까?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복합문화공간


역대 우승 트로피와 유니폼 변천사 등이 전시된 클럽하우스는 

메이저리그 구단을 벤치마킹해 SK와이번스 선수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4 현역 플레이어 존에서는 SK와이번스 선수들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팬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 이벤트 공간이다.

긴 경기 시간동안 지루해할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어린이 체험존

직접 야구공을 던지고 받아보며 야구와 친숙해질 수 있다.


문학야구장에는 키즈존과 그린스포츠 체험관, 수유실, 의무실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관람객의 편의를 한층 높였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선수 전용 클럽 하우스는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을 벤치마킹해 호텔 못지않은 시설을 자랑한다. 이러한 공간적 배려는 곧 선수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건축 설계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장소, 문화적 특성과 사용자 성격을 고려해 변화를 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바로사용자 중심 디자인이다. 문학야구장은사용자 중심 디자인’에 기반해 인천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딱~”


관중의 함성이~’ 하고 크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하늘 중앙에 모인다. 하얀 점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외야 쪽으로 날아간다. 달려가던 수비수가 펜스 앞에 멈추어 선다. 공은 펜스를 넘어 숲 속으로 떨어진다. 홈런이다! 타자가 손을 들어 관중의 응원에 답하며 홈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에 아테네 경기장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고대의 승리자도 저렇게 들어왔을 것이다. 고대의 관중도 지금의 관중처럼 환호했을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고대의 원형을 우리의 몸속에, 문화 속에, 건축 속에 지니고 산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불어온다. 원형경기장의 조명탑에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김종진 교수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와 미국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건축과를 졸업했다. 뉴욕의 폴쉑 파트너십, 런던의 KPF,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 등에서 일했고, 지금은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실내건축설계학과 교수다. 일상의 공간 경험이 지니는 의미를 연구해 여러 저널과 전시회에 발표하고 있다.


출처 : '사보 SK' 9월호

Posted by SK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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