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투수의 등판은 일주일에 한두 번. 그 이외의 날은 '휴식일'이지만, 사실 이 '휴식일'은 다음 등판을 위한 '준비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단순히 공을 잘 던지는 것 말고도 스스로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지 아는 것도 선발의 덕목이다. 선발투수들은 자신의 등판일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을 던지기 위해 예민하면서도 꼼꼼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시간을 할애한다.
큰 틀부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선수들마다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기에, 이 세상에는 투수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루틴이 존재한다. 2015년부터 풀타임 선발을 시작한 SK 와이번스 박종훈이 현재의 루틴을 정립하게 된 것은 2017년 즈음부터다.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특히 메이저리거가 된 동료 메릴 켈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자신만의 루틴을 찾아나갔다.
◆날마다 운동 강도도, 식사도 다르다
선발 등판 다음날 몸에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는 것으로 새로운 주를 시작한다. 최대한 몸을 가라앉히는 날로, 박종훈은 러닝과 사이클을 타고 레플다운, 데드리프트와 스쿼트, 런지 등 항상 정해진 만큼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소화한다. 코어 운동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데, 계절에 따라 방식을 달리 한다. 이 날은 고기 위주로 최대한 간이 되지 않은 음식을 선택한다. 그 이튿날은 완전하게 휴식을 취한다. 음식도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등판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성 운동과 코어 운동, 보강 운동과 러닝을 하고, 음식 조절도 시작한다. 박종훈은 등판 이틀 전 불펜 피칭을 하는데, 개수는 33개로 정해 놨다. "딱 그 정도를 해야 좋다"는 것이 박종훈의 설명이다. 그리고 등판 하루 전에는 장거리 러닝과 캐치볼을 소화한다. 캐치볼은 "느리게, 폼을 다 느낄 수 있도록" 던지는 것이 포인트. 등판을 앞두고는 맵거나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음식은 최대한 피한다.
◆등판 D-DAY "내 심장이 뛸 때가 기회다"
등판 당일, 박종훈은 되도록 취침 시간을 7시간에 맞출 수 있도록 한다. 집에서 나서 구장에 도착해 라커룸에 들어가는 길은 항상 같게, 주차도 늘 하는 곳에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미팅을 한 뒤 몸을 풀기 전에는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진다. 소설, 자기계발서, 재테크 책도 상관없다. 잠시 야구와 벗어나 긴장이 풀리도록 하는 시간이다. 이후 노래를 들으며 몸을 풀기 시작한다. 거의 랩이 있는, 빠른 노래들로 트랙리스트는 4년 째 같다.
그라운드로 나설 때는 스파이크를 무조건 왼쪽부터 신고, 경기 개시 전 섀도 모션은 20회 정도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한다. 캐치볼은 13번을 한 뒤 잠시 쉬었다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에 다시 13번을 한다. 박종훈은 "선발투수가 올라가기 전 쉬는 시간이 10분 이상이 되면 몸이 경직될 수 있다고 해서 최대한 시간을 맞춰서 몸을 풀고 올라간다"고 전했다.
반복되는 일상과도 같지만, 여전히 초구를 던지기 직전 그 순간은 긴장감이 엄청나다. 마운드에 오른 박종훈은 심호흡을 하면서 자신을 위한 말들을 되새긴다. "즐겁게, 자신 있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편안하게". 경기 중 위기 상황이면 "내 심장이 뛸 때가 기회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이 글귀를 알게 된 뒤 위기 대처 능력이 좋아졌다. 등판을 마친 후에는 상체 보강 운동을 한 뒤 사이클을 15분 정도 탄다. 박종훈의 경우 아이싱은 하지 않는다.
◆루틴,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
박종훈은 "선수들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밸런스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나도 잃어버릴 수 있겠지만, 최대한 빨리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불안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스프링캠프에서도 잠시 밸런스를 잃었었는데, 감독님이 우연찮게 '과거에 대해 생각해봐라. 내가 어땠는지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마침 2015년부터 적었던 걸 다 들고 갔었는데 그 자료를 다 보고 그대로 해보면서 '그래, 이거였지' 느끼게 됐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기반이 단단하다는 확신이 있기에 새로운 시도에도 두려움이 없다. 박종훈은 "캠프 때부터 준비가 잘 되고 몸 상태가 좋았던 것도 내 루틴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다른 것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루틴이 없고 내게 좋은 지, 안 좋은 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는 이렇게 하면 내 컨디션과 폼이 좋아지는 걸 알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엑스포츠뉴스 조은혜 기자(eunhwe@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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